1. 이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한 10권 안짝까지는.


 

2. 헌데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읭? 하고. 



3. 첫번째로 느낀것은 반복으로 인한 지루함이었다. 관리가 되려는 꿈을 안고 나아가는 씩씩한 홍수려 아가씨. 주변에는 이런저런 소동과 사건이 발생하고, 매력적인 남캐들이 우르르 나오며, 엉킨 듯한 실타래가 막판에 반전과 함께 수려의 활약으로 시원하게 풀린다. 그리고 범인은 의외의 인물. 종장의 남은 2페이지 정도는 수려와 류휘의 달콤한 조우를 위해 사용된다. 어우, 재미있었지. 헌데 이 패턴이 매권마다 반복되었다. 매권마다, 계속.



4. 물론 내용이 재밌으면 패턴의 반복 따위야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중간의 사건 해결해가는 이야기는 제대로 읽지 않게 되었다. 복선은, 이야기 구조는, 독자가 흥미를 가지고 따라갈 수 있도록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채운국 이야기의 스토리텔링은 더이상 읽는 이의 흥미를 끌어내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채운국 이야기라는 작품이 독자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 첫번째로 <채운국 이야기>가 점차 인기를 끌면서 스케일이 커지는 과정에, 너무 많은 새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이 유입되어버렸다. 기존의 캐릭터들에 집중하고 있던 독자들은 새 권을 읽으며 당황한다. 어, 이거 뭐지 하고. 그리고 간신히 새 인물에 익숙해지나 하면 다음 에피소드에선 또 다른 인물들이 또 다른 비밀과 과거를 가지고 등장했다.



물론 이게 그저 수려를 중심으로 한 옴니버스의 형태라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작가는 채운국 4성6부 모두의 요인들을 등장시키고, 하나하나의 과거 이야기와 캐릭터들을 내세우고, 그들 사이사이를 온갖 혈연관계와 에피소드로 엮었다. 그리고 끝까지 이걸 안고 이야기 전체의 큰 줄기 삼아 나아가 버렸다. 그 결과 채운국 이야기라는 작품 자체의 밀도가 확 낮아져 버렸다. 수려와 류휘의, 정란의, 그리고 다른 측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와글거리는 수많은 궁금하지 않은 인물들의 궁금하지 않은 인생사를 외전으로 봐야 했다. 그들의 별로 흥미롭지 않은 정쟁과 과거와 암투를 봐야 했다. 



나는 류지미의 과거나 능안수의 중2병 독백, 혜가라는 관리의 유능함보다 수려와 류휘의 감정선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가 좀 더 궁금했다. 손능왕이 든 검에 대해서보다 동생을 라이벌로 여기던 정란의 수려를 향한 마음이 어떻게 정리되는 지가 궁금했다. 혹은 수려가 어떻게 진정한 관리로서, 여성으로서 어떻게 차곡차곡 성장해 나아가는지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 저기 어디 표류화 할매 같은 사람의 구구절절한 이야기 같은 건 정말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헌데 작품 중반즈음부터 채운국 이야기는 더이상 수려와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저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사연과 거미줄 같은 얽힘에 가로막혀 우스울 정도로 비중이 낮아져 버렸다. 그리고 초반에 독자를 흡입하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아기자기한 요인들은 하나둘씩 잊혀지거나 사라져 갔다.

나는 어느새 고관대작 아저씨들로 가득 차 재미 없어져버린 이 유사 중국풍 판타지 소설을 계속 읽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6. 그리고 두번째로 내가 이 작품에 식어버린 좀 더 큰 이유로는, 지나치게 복잡해져버린 이야기구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반전이 새로웠고 즐거웠지만,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작가는 더 많은 복선과 더 놀랄 반전을 만들기 위해서만 고군분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덕분에 수많은 복선들이 작품 내에 심어졌고 억지다 싶은 뜬금포들이 계속 터졌다. 



캐릭터들은 막판의 반전을 꽁꽁 숨기기 위해 독자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자기네들만이 아는 대화를 계속 나누었고, 알 수 없는 배경과 감상적인 독백, 모호한 암시들이 글 전반을 뒤덮었다. 앞서 말한 이유로 흥미를 잃어 더이상 보지 않다가 다시 꺼내든 새로운 권은(15권쯤 이후로) 그 경향이 더 심해져서, 심지어 읽는 이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뭐야. 니들이 말하려는 게 대체 뭔데. 너무도 복잡하고 비대해져버린 이야기는 흥미롭게 추측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고 과연 이 내용 흐름에 개연성이 있나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다. 궁금함이 짜증이 되고, 마침내는 그걸 까먹을 때쯤 되어서야 풀어주는 설명들이 나타났지만 이미 사소한 복선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후였다.

 


나는 머리를 쓰며 따라가야 하는, 혹은 반전이 있는 촘촘한 작품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BBC의 셜록이나 조앤롤링의 해리포터, 아가사 크리스티 시리즈 같은 작품들은 흠뻑 빠져 보기도 했다. 헌데 채운국 이야기는 그토록 촘촘한 이야기구조를 공들여 짜내려 애썼음에도...어딘가 몹시도 엉성해 보였다. 난무하는 뜬금포와 온갖 잔가지 이야기들 때문에 깔끔하고 멋진 스토리가 되지 못했다. 철과 소금, 위폐 등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를 아리송한 암시와 대사만으로 몇 권씩이나 끌었으면서 결국은 그게 왕계의 왕권찬탈을 위한 준비 중 하나였다 정도로 허무하게 마무리해 버렸다. 완결권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돋는 정유순의 비현실적인 능력은 짜증을 넘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작가는 후기에 몇 번인가 1권으로 끝날 소설이 여기까지 왔다고 밝혔다. 그때문인지 뒤로 갈수록 작품은 기존의 미덕과 색채를 잃고 달라져 갔다. 중후반부에 뜬금없이 등장한 왕계라는 인물. 그리고 그를 따르는 수하들. 이미 '최종보스'가 되기 위해서 만들어져 스토리에 끼워넣어졌을 그가 나타나버린 이후로 나오는 비밀스런 음모와 술수들은 더이상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왕계와 관련돼 있을테니까. 신이 왕계의 부하였던것도, 여우가면을 쓴 이들의 정체도 뒤늦게 밝혀져봤자 하나도 감흥이 없던 건 그때문이었다.



역시 작가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망가뜨려 버린 사례 중 최악은 다삭순이겠지. 허허...7권쯤에서 죽었다가 예의 복선과 암시 속에 잠수. 그리고서 한 21권쯤에 갑툭튀하길래 얜 진짜 뭔가 했다. 안그래도 능안수와 캐릭터가 겹쳐서 안습이었는데 결국은 이복동생이다~걔한테 이용당했다~라니...이 형편없는 짜임새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얘 덕분에 홍수려가 좀 더 살게 됐다 해도 짜증이 가라앉지 않을 만큼. 



7. 내가 채운국 이야기로부터 보고자 한 건 표지와 1권으로 낚였던 당시 그대로, 중국풍의 세계관과 아기자기한 달달함을 가진 홍수려의 이야기였다. 뭐 일 반 연애 반 정도로, 주변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어떻게 케미를 살리며 씩씩하게 성장해 나가나를 기대하기도 했다. 보통은 이런 장르를 라이트노벨이라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내가 바란건 그정도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대형(가상)역사로망이나 뭐 거대한 정치암투극을 기대하지 않았다. 쫠깃한 반전과 감동이 동시에 있는 폭풍 짜임새의 추리극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헌데 작가는(혹은 편집자는) 그러한 평가를 얻길 바랐던 모양이다. 몸집을 불렸고, 세계관을 키웠고,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채 읽는 이를 슬프게 만들었다. 



8. 내가 이 소설을 보게 된 지도 8년이더라. 내가 보던 딱 두 개의 라이트노벨 중, 채운국보다 좀더 이른 시기에 먼저 완결이 났던 풀메탈패닉은 정말 완결까지 좋은 완성도를 보여줬었는데.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충실한 상태로 스토리를 어떻게 끌어가느냐의 차이겠지라.





흠 쓰다보니 순 승질만 부려놓은 거 같은데 그게 다 뭐 애정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겠징ㅎ 진짜 애정도 없었다면 이렇게 긴 글도 못씀.


아무튼 궁중정치극(을 표방한) 주제에 세세한 부분까지 동화처럼 어처구니없는 해피엔딩이라 해도, 수려 30살 되도록이나마 살아서 다행이고 류휘 홀애비귀신으로 안 죽어서(ㅋㅋ) 다행이다. 그리고 둘은 잠시나마 행복했을테니 다행이다. (내 정란옵빠는 우즈캥 흡...)


작가님도 이 글 볼 일 없겠지만 그간 감사했고, 수고했습니다. 님 집 벽돌 몇개는 제가 얹어준거예요.

언젠가 내가 작가님의 글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좀 더 설레게 만드는 멋진 작품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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